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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SSION OF CHRIST"에 대한 분석

김 영 재 박사 / DR. YOUNG-JAE KIM 2008. 4. 28. 14:09

이 영화는 멜 깁슨이 감독, 각본, 제작하였으며, 짐 카비젤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으며, 마이아 모겐스턴이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맡았으며, 모니카 벨루치가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의 제목은『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써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수난' 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죄인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하고도 소중하며, 없어서는 안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믿고 구원 얻을 사람들은 모두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제한 속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는데 그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원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수난이 그의 죄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는 잘못된 시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어떤 영상물을 봄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상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믿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될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영상물이라는 자체가 어떤 사실적인 근거를 토대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독특한 성향 때문에 전체의 내용 중에서 추가하거나 삭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분의 전 생애를 다룬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수난 과정만을 그린 작품이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며, 폐쇄적인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가장 중요하고도 중점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모든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것이기에 정확한 내용을 바로 시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모든 부분을 다 삭제해 버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장면만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상으로 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돈독히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이 영화는 믿는 사람들만 보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이 영화가 공개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비록 저들은 육신적인 감정으로 감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밝히 보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거룩한 분노(?)를 느꼈는데 이 분노는 영화상에서 예수 그리스를 처절하게 학대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든 사람과 이 영화가 방영되고 있다는데 대해서 금할 길이 없는 분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시대의 유행이나 양식에 따라 영상물을 통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영상물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그 순간뿐이고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그 영상물을 통해서 신앙인들의 믿음이 더 낙후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이 결코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킬 수 없음을 강하게 피력하는 바이다. 유행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는 "Fashion" (패션)인데 이 패션은 수난의 뜻을 가지고 있는 "PASSION" (패션)과 똑같은 발음이며, 다만 앞의 철자인 'F'와 'P' 만 다를 뿐이다. 이것을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인 "PASSION"

(패션)이 지금은 유행인"Fashion"(패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그 고귀한 수난이 유행이 되어 영상물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방영되어 버리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쉽게 매도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가 전락되어 희석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뉴 에이지(New Age)의 특성 중에 하나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상화되면 그 자체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훼파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적인 내용을 다루는 영화는 그 성경의 내용을 바로 인지하는 사람만이 제작해야 하는데 이 영화를 감독한 [멜 깁슨]은 진정으로 성경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인가를 볼 때 결론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문구를 보면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인데 이 말에서 표명하고자 하는 사랑의 가치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하지 못한 사랑인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최대의 사랑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한 매질과 비난과 혹독함을 받음을 구심점으로 하여 그 자체만을 사랑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구원의 사랑이 결부되어 버린 것이다. 이 영화는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대주교라는 천주교의 거물급들(?)이 추천한 영화로써 기독교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 말은 이들의 주장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중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라고 불리는 점과 아울러 마리아의 대사가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마리아의 대사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라고 말하는데 우리 인간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다. 그 분의 고난은 구원의 방편이므로 혼자 당해야만 하는 것이지 결코 누가 동참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동참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과하시고 외면하셨다. 이 영화의 내용을 분석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영화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은 기독교적인 시각이 아닌 천주교적인 시각으로 비춰지는데 예수님이 아닌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전부 진 것처럼 강하게 묘사되어져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으로서 지극히 반기독교적이며 성경상으로 용납될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시사한 것으로써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영화는 성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을 통해 이 영화가 논란의 대상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고 하는데 과연 교황 바오로 2세가 성경의 의미를 아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가 성경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바로 그가 성경의 의미를 모른다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교황과 추기경과 대주교가 추천한 것이기에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천주교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성경을 보는 시각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서로 근접할수도 없으며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이 천주교의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근거로 한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하며, 강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예수는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천주교적인 시각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는데 심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이 영화를 많은 기독교인들이 보았으며, 많은 목사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좋은 평을 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바이다. 이 영화는 성경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혼잡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125분에 걸쳐서 방영된 영화인데 첫 화면상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는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이 나오면서 B.C 700년이라는 이사야서가 기록된 연대가 나온다. 이 연대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므로 영화상에서 연대가 기록된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연대 표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B.C 739년부터 그가 므낫세 왕에게 죽은 B.C 680년까지 활동한 선지자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인데 이 연대에서 알 수 있듯이 B.C 700년에 이사야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 연대에 포함은 되었지만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은 그리 길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정확하고도 포괄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말씀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 말씀을 모두 다 소개하지 않고 앞부분과 뒷부분인 두 단락만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구절은 네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를 소개하지 않고 두 단락만을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가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이는 잘못된 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설령 구절이 길다고 할지라도 모두 다 소개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의 내용 또한 예수님의 일대기를 모조리 삭제해 버리고 수난 장면만을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대기를 모르는 사람들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쉽상이다. 그러면 이 영화의 내용을 성경에 입각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가장 처음 장면으로 겟세마네 동산이 나오고, 그 동산에서 예수님이 서서 한 쪽 손으로 나무를 잡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기도한다고 하기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두려워서 흐느끼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비록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두려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장면을 너무도 강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사건 전의 일을 전혀 다루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영화란 장편 드라마가 아니기에 그 제한 된 시간내에 모든 것을 시사해야 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신약의 전체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의 성경 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특성상 그 모든 것을 다 방영할 수는 없는 것이며, 또 그렇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영화상의 내용과 연결되는 꼭 필요한 부분만은 방영해야 하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연코 성경을 영화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특정 구조상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할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강하게 피력하는 바이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걸어가시고, 제자들은 힘겨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두 부를까요?' 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 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처절하고 나약한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또 다시 예수님께서 심하게 흐느끼신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인성적인 모습이 너무나도 강하게 보여지고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아닌 천주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에 예수님의 인성적인 모습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모두 다 예수님의 신성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성적인 모습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시어 오신 하나님으로 바라보며,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가 낳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라고 하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적인 영화가 아닌 천주교적인 영화인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앙에 혼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제발 절 지켜 주소서, 그들의 덫으로부터 구해 주소서, 한 인간의 힘으로 어찌 죄의 짐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 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탄의 유혹의 음성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아무도 그 무거운 짐을 질 수는 없어, 영혼 구원의 대가는 너무도 커 아무도.... 절대로.... " 이다. 그리고 계속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사탄의 음성이 연이어 나오는데 그 내용은 " 네 아버지가 누구인가? 넌 누구인가? 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지나치게 나타내고 있는데 제발 지켜 달라는 내용은 성경에도 없는 내용이며, 굳이 이 내용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마태복음 26장 39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다. 그러나 지켜 달라는 말과 이 말은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지켜달라는 것은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실수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합당하지 않는 말인 것이다. 또한 이어서 '그들의 덫으로부터 구해주소서' 라는 말, 또한 성경에도 없는 지극히 잘못된 것으로써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로써 이 말을 반증한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덫에 걸리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억지로 진 것인양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탄이 '아무도 그 무거운 짐을 질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것 또한 성경에 없는 내용인 것이다. 비록 성경에 예수님이 40일 금식 이후에 사탄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탄이 유혹했다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다. 이렇듯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는 부분을 이 영화에서는 삽입하므로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사탄의 유혹을 받는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누구이며, 넌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이 마치 무지한 사람인 것인양 표현하고 있다.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지쳐서 쓰러지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등을 하늘로 한 채 누워 버리셨고, 뱀이 등장하여 쓰러져 있는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손등을 넘어 얼굴로 가려는 순간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뱀의 머리를 발로 밟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처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내용이 삽입된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과 순서가 바뀐 내용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오류성을 인정하게 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판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시자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하자 유다가 도망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 다시 끌려 온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은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써 성경에서는 유다가 도망가지 않고 바로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였다. 이처럼 유다의 도망을 통해서 유다의 뉘우침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유다의 죄악상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보다 앞서 방영되었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에서도 유다가 방황하는 예수님을 책망하고 정의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로마 군병들과 제자들이 심하게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비록 성경에서도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심한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묵상해 보면 이러한 난투극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난투극을 벌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폭력주의이며, 그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을 당하시고 심한 채찍질을 당하신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주자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간 곳은 마가복음 15장 16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채찍질을 당하신 것이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채찍질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아직 법적으로 죄인임이 표명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폭력은 합법적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당하실 때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심하게 아주 모욕적으로 때리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이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제 계속적으로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을 살펴볼 것인데 그 내용은 예수님을 진정한 고난의 의미를 바로 전달하는 것이기보다는 모욕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마리아가 잠에서 깨어나 '오늘밤은 다른 밤과 다르다' 고 하는데 이 내용은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적인 내용인 것이다. 비록 여성적인 예민한 감정과 어머니로서의 느끼는 바가 있겠지만 이것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설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홉 번째로, 이 영화에서 결박당하신 예수님이 끌려가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 장면은 짐승이 끌려가는 장면보다도 더 심하게 비춰지고 있다. 그리고 잡혀가면서 이유도 없이 모질게 매를 맞으며, 주먹으로 심하게 구타를 당하신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직 법이 집행되지 않았기에 인권유린에 해당하는 것이다.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은 그 주먹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던지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머리가 땅에 닿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긴 쇠사슬에 매어 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떨어진 예수님은 그 곳에 숨어 있던 자신을 판 유다의 얼굴을 보게 되며 그러자 유다는 두려워하게 되고 난데없이 원숭이가 나타나 고성을 지르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떨어진 예수님은 군병들에 의해서 끌어 올려진다. 이러한 내용 또한 성경에 전혀 있지 않는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써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자들에게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원숭이는 길거리에 흔하지 않는 동물로써 그러한 원숭이를 등장시킴으로써 묘한 매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열 번째로, 이 영화에서 끌려온 예수님을 가리켜 '이 거지를 왜 끌고 왔냐?' 고 묻자 '나사렛의 말썽꾼 예수다." 고 대답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대사 가운데 예수님을 수식하는 단어가 '거지'와 '말썽꾼'으로 나온다. 말썽꾼이라는 말은 그런데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거지라는 말은 예수님을 향한 지나친 모독이며, 굳이 이러한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심한 어투인 것이다. 이 거지라는 말이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전하는데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해 볼 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 말고 그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는 것이다.

열 한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판 유다를 어린이들이 조롱하는 장면과 그 뒤에 사탄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유다가 너무나도 괴로운 나머지 목을 메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죽어 있는 낙타가 보이며, 그 낙타 주위로 몰려드는 날 파리 떼가 보이는데 마치 유다가 이것을 보고 죽음을 결심한 것으로 묘사되어 지고 있다. 이것 또한 성경에 없는 내용을 자의적으로 추가시킨 것이다. 이처럼 사탄이 영화를 통해서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더더욱 성경의 내용을 영화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다. 

열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가 땅에 입맞춤을 하고 그 땅 아래에는 예수님이 천장에 두 손이 묶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성경상으로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가신 후에 한 시도 쉴 틈도 없이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열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그 때의 예수님의 한쪽 눈은 너무나도 많이 맞아서 감겨져 있는 상태이고, 예수님이 하늘을 바라보시는데 날아가는 새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하게 눈을 맞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절한 육신의 상태를 이 영화에서는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열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 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스스로 묻고 싶어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저들이 그렇게 하니까 묻는 것이냐?' 라고 하시며 '넘겨준 자의 죄가 크다' 라는 대사가 묘사되는데 이 대사는 빌라도의 죄를 묵인하는 비 성경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을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다. 또한 '저들 손에 넘겨 죽게 해선 안돼!' 라는 빌라도의 독백이 나오는데 이 독백이 빌라도의 죄가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준 것이다. 

열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주자 끌려가신 예수님은 허리 높이에 설치되어 있는 수갑으로 두 손이 묶이신 채 군병들에게 조롱을 당하신다. 그리고 그 장소에 여러 가지 종류의 채찍이 있는데 군병들이 채찍을 고르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준비됐나이다. 아버지' 라고 하시며, 사탄이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지나간다. 이제 예수님은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시는데 당하실 때마다 살에 채찍의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게 되고, 피가 흘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이 장면을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뜻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때리는 강도가 얼마나 강하던지 그 때리는 자들이 숨을 헐떡거릴 정도이다. 또한 끝에 갈고리가 달린 것으로 채찍을 바꾸게 되는데 시범적으로 나무 책상을 때리자 쉽게 갈고리가 책상에 박히게 되고 그 박힌 채찍을 잡아떼자 나무가 뜯겨져 나오게 된다. 그런 무시무시한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때리자 순식간에 갈고리가 예수님의 살에 박히게 되고, 그 박힌 채찍을 강하게 떼자 살점이 떨어져 나오게 된다. 바로 이러한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로 끔찍함을 느끼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무참한 채찍질로 예수님의 몸을 가격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채찍질로 하여금 예수님의 등은 갈기갈기 찢어져 골이 패이게 되자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앞으로 돌려서 앞가슴을 채찍으로 때려 온 몸에 채찍 자국과  그로 인한 피로 얼룩지게 하였다.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보다는 역겨울 뿐이었다. 

열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는 것을 지켜 본 마리아는 '내 아들아 언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느냐?' 고 절규한다.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여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세마포를 준다. 이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은 내용이다. 채찍에 맞아 쓰러져 있는 예수님을 군병들이 양팔을 잡고 끌고 나가자 그 자리에 피가 줄을 그리게 되고 그 현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빌라도의 아내로부터 받은 세마포로 그 현장의 바닥에 있는 피를 닦아 낸다. 이 장면을 통해서 다시금 예수님이 흘렸던 피의 양을 추측하게 하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피를 많이 흘려서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야 할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열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가시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우고 양쪽에서 두 사람이 막대기로 가시관을 눌러 머리에서 피가 나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너무나도 지나치게 예수님의 고난을 표현하여 학대의 관점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 예수님의 머리를 때린다.  

열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과 두명의 강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두 강도는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하는 횡목을 지고 가는 반면에 예수님은 십자가 모양의 나무를 지고 간다. 그러나 원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하는 나무가 서 있기 때문에 가로의 부분만을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강도가 지고 간 십자가의 가로 부분은 맞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맞지가 않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죄가 상대적으로 더 커 보이게 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그리고 골고다 상에서 두 강도의 십자가는 'T' 자인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 자로 묘사되어져 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벌 기구로써 고대 시대에는 하나의 긴 기둥을 사용했다가 점차 'T' 자형(Crux Commisa), '†' 자형(Crux Immissa), 'X' 자형(Crux Decussata)으로 발전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세가지의 형태 중에 '†' 자형이 사용되었으며,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 시대에는 'X' 자형이 사용된 것이다. 그러기에 두 강도도 'T' 자형 십자가가 아닌 '†' 자형 십자가가 맞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어떤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열 아홉 번째로, 이 영화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는 예수님을 마리아가 일으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일으키는 마리아에게 '보소서 어머니, 제가 모든 걸 새롭게 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 장면을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성모 마리아설을 긍정하게 한다. 또한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삽입하므로써 마리아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무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갈릴리인으로 소개하는데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헤롯을 피해 나사렛에서 사신 분이시다. 그리고 다만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름 앞에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름을 붙이는데 예수님은 갈릴리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인 것이다.

스물 한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말하자 시몬은 싫다고 거부하게 되고, 또 다시 지라고 하자 '좋소, 허나 나는 죄 없이 십자가를 지는 거요.' 라고 말한다. 이 시몬의 대사를 상대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시몬은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질 만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스물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군병들이 채찍으로 때리자 그 충격으로 예수님은 튕겨져 나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수가 잘 지고 가지 못할 때에 채찍으로 때리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상태에서 때리는 것이며, 필요 없는 채찍질로 하여금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채찍으로 때리자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놓고 그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을 때리면 한 발자국도 안 가겠소' 라고 한다. 이러한 장면은 성경에 없는 것으로써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상상하여 그려 낸 자작 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지쳐 있는 예수님께 시몬은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요, 이제 다 왔어요' 라고 부추긴다. 이처럼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묘사하여 마치 예수님이 아닌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물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닦아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이다. 이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여인이며, 카톨릭 전통에 나오는 여인으로서 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피를 닦아 준 베일이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이 베로니카는 그 베일로 로마 황제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하며, 또한 그 후에는 클레멘트 교황과 다음 계승자들이 간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는 베로니카라는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성경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천주교의 영화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스물 네 번째로, 이 영화에서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가 땅바닥에 펼쳐져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하는 나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에 큰못을 박는데, 그 못을 박는 큰 망치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치고 내리친다. 그 때마다 못의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피를 흘리게 된다. 이제 한 쪽 팔을 못 박은 후에 다른 팔을 못박으려고 끌어당기자 그 팔이 끌어 당겨지지 않게 된다. 그러자 그 팔을 줄로 묶고 그 줄을 무참하게 잡아당긴다. 그러자 마치 팔이 찢어지는 것과 같이 당겨지게 되고 그 손에도 못을 박게 된다. 그러자 그 못이 손과 나무를 뚫고 나와 그 나무 밑바닥에 못을 끝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발목의 버팀목을 십자가에 박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아 발목에도 못을 박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장면이 너무나도 끔찍하여 지켜보던 마리아가 땅바닥에 있는 흙을 움켜쥔다. 이러한 끔찍하고 적나라한 고통의 장면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밝히 보지 못하게 하게 오히려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스물 다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십자가를 뒤집는데 십자가의 가로의 한쪽 끝 부분과 세로의 아래 쪽 부분을 지렛대로 삼아 십자가를 뒤집는 것이다. 그리고 뒤집힐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전해지는 충격은 너무나도 큰 것이다. 또한 십자가를 뒤집을 때 그냥 놓아 버려서 바닥에 꽝하고 떨어지게 한다. 그 충격 또한 대단한 것으로써 이미 채찍에 맞아 찢기신 살에 가해지는 쓰라림은 정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뒤집힌 십자가에 손과 나무를 뚫고 나온 못의 끝부분을 망치고 휘어지게 하여 안 빠지게 고정시킨다. 그리고 난 후에 다시 십자가를 뒤집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죄명이 기록된 패를 박고 미리 파 놓은 구멍에 그 십자가를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형벌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이는 예수님의 고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은 채로 그 십자가를 두 번이나 뒤집고, 세우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필요 없는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전혀 사실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장면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스물 여섯 번째로,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눈을 까마귀가 날아와서 파 먹고 머리를 심하게 쪼게 되자 군병이 긴 막대기로 그 까마귀를 내쫓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러한 성경에도 없는 끔찍한 장면을 이 영화에서는 무분별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인데 이 장면은 그러한 용서의 개념 까지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스물 일곱 번째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하고 말하기를 "내 살에서 나온 아들아! 내 영에서 나온 영이여, 나도 함께 죽게 해 다오' 라고 한다. 이 대사는 성모 마리아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 다시 한 번 이 영화가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의 영화임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기에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표현을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영에서 나온 영이라는 말은 전혀 합당치가 않은 것이며, 이는 성모 마리아설을 강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영이 마리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영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인 것이다.

스물 여덟 번째로, 이 영화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이지만 믿는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그 추한 저주받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십자가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의혹을 품게 한다.

끝으로, 이 영화에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며 성경과는 달리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덤 문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오시는데 그의 손바닥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손바닥이 아닌 손목에 못이 박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물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으며 비록 성경의 내용을 영화화하였지만 성경을 기초로 하지 않고 감독의 자의적인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은 그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이 영상화되어 버리면 훼손될 우려성이 심히 큰 것이다. 필자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앞에 가는 부부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아마도 부인이 불신자인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 같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편이 한 말은 '무슨 영화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만 나오냐?' 이다. 이 한마디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며 필자도 공감하는 말이다. 비록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양성을 배제한 이 영화는 그릇된 오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시간 관계상 그랬다고 할지는 몰라도 이것은 핑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내용으로 하는 영상물들을 하나같이 성경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다. 이단의 특색 또한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골라서 마치 그것이 진리이며, 전부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통해 진리가 토막 나고, 희석되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탄의 전략(戰略)을 깨달아 알고, 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對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어야 할 것이다(엡 6:11).